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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헤밍웨이의 쿠바: 작가가 머문 도시의 재해석

1. 헤밍웨이와 쿠바: 사랑에 빠진 작가의 두 번째 고향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게 쿠바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곳을 “나의 두 번째 집”이라 부르며, 생의 중요한 시기를 이 섬나라에서 보냈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약 20여 년 간 쿠바에 거주한 그는 아바나 근교 산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지역의 ‘핀카 비히아(Finca Vigía)’라는 저택에서 작품을 집필하며 지냈다. 이 집은 지금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수많은 작가 지망생과 문학 애호가들이 그의 흔적을 좇아 방문하는 성지와 같은 공간이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쿠바 앞바다 코히마르(Cójimar) 마을에서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으로, 이 책은 1954년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줬다. 쿠바는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였으며, 동시에 내면의 고독과 싸우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쿠바의 더위와 인생의 고단함, 어부들과의 교류, 그리고 아바나 시가의 향은 그의 문체에 독특한 음색을 입혔다.

헤밍웨이의 쿠바 생활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바다. 이곳은 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이키리(Daiquiri)는 라 플로리디타에서만 마신다"고 했을 정도로 애정을 담았던 곳이다. 지금도 이 바의 카운터 한켠에는 그가 좋아했던 좌석이 남아 있으며, 그의 실물 크기 동상이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그가 마셨던 칵테일을 그대로 주문하고, 동상과 사진을 찍으며 헤밍웨이의 하루를 간접 체험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작가가 문장을 가다듬기 전 삶을 예열하던 창작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그 이야기들을 곧바로 종이에 옮기곤 했다. 라 플로리디타는 헤밍웨이의 문학이 쿠바의 민중성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며, 우리가 ‘작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드문 장소다.

2. 핀카 비히아: 작가의 사생활과 창작의 요람

핀카 비히아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헤밍웨이 문학의 실제 창작 공간이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책과 원고, 사냥트로피, 타자기 등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침실 옆에는 그가 서서 글을 썼다는 타자기가 놓인 책상이 있으며, 벽에는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초기 작품이 출간되었던 당시의 판형이 장식되어 있다. 이 공간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바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벽에 그려진 몸무게 체크 그래프나 수조 속 열대어들, 수많은 고양이들과 개들이 지냈던 흔적은 ‘위대한 작가’라기보다는 ‘자연과 삶을 사랑한 인간 헤밍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집은 그가 가장 사랑한 장소였으며, 미국과의 외교 단절 이후에도 오래도록 떠나기를 주저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이 집에선 그의 손길과 문장의 향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3. 코히마르 마을과 ‘노인과 바다’의 현실

쿠바 동부의 작은 어촌 마을인 코히마르는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장소로, 실제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던 어부들과의 교류가 작품 속 ‘산티아고’의 모델로 이어졌다. 그는 이 마을에서 어부들과 낚시를 즐기며, 진짜 바다의 냄새와 파도의 리듬을 느꼈다. 그가 즐겨 타던 어선 ‘엘 필라르(El Pilar)’는 지금도 핀카 비히아에 보존되어 있으며,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는 실제 ‘산티아고’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다. 마을에는 헤밍웨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바닷가 인근의 ‘라 테라사(La Terraza)’라는 선술집은 지금도 그가 즐겨 찾던 명소로 남아 있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단순히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쿠바인들과 함께 살고, 마시고, 일상을 나눈 이방인이었다. 그가 묘사한 바다는 상징이 아닌 현실이었고, 그 바다를 이겨낸 ‘노인’은 실존 인물의 투쟁 그 자체였다. 작품 속의 강인함과 고독은 코히마르의 삶과 물결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밍웨이의 쿠바: 작가가 머문 도시의 재해석

 

4. 문학의 도시 쿠바, 헤밍웨이를 품다

오늘날 쿠바는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통해 문학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매년 열리는 ‘헤밍웨이 국제 낚시대회’는 그가 생전에 즐기던 바다낚시를 기념하며 전 세계 낚시 애호가와 문학 팬을 끌어들인다. 아바나 시내에는 그가 단골로 찾던 바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와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가 여전히 성업 중이며, 내부에는 그의 흉상과 유명 인사들과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쿠바는 단순한 문학 유적지를 넘어, 문학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과의 외교 복원 이후, 쿠바의 문화 콘텐츠 산업은 서서히 개방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헤밍웨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문장은 살아 있고, 그 문장을 낳은 공간들은 여전히 여행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 쿠바의 골목과 마을, 바다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문학이 삶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체험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1961년 미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기억은 쿠바 땅에서 영원히 머문다. 쿠바 정부는 핀카 비히아를 작가 사후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이 집은 단 한 번도 상업화된 적 없는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침대, 타자기, 책장, 손으로 그린 사슴 뿔 수치들까지,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멈춰 있다. 쿠바의 문학 지형에서 헤밍웨이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아바나 대학에서는 그에 대한 문학 세미나가 열리고 있으며, 작가가 자주 방문했던 장소들은 ‘헤밍웨이 루트’라는 이름으로 여행자들에게 소개된다. 그가 남긴 문장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한 도시와 한 인간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다. 쿠바는 단순히 헤밍웨이의 피난처가 아닌, 그와 공명한 예술적 공동체였고, 이제는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과 함께 그 유산을 보존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작가는 떠났지만, 도시가 그의 서사를 기억한다. 헤밍웨이는 떠났지만, 그의 삶은 쿠바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